2018년 10월 호

개발자 2019.02.12 11:25 조회 : 695

Vol. 50

2018년 10월호

현하(現下) 백세시대에서 요설(饒舌)

국립무용센터 건립 추진단 지역 간담회에 붙여
- 국립무용센터 건립 추진을 보는 지역의 시선 하나.

국립무용센터 설립에 공감하면서 한 가지 생각을 더 해 본다. 이 나라의 국격을 고려하더라도 당연히 국립무용센터는 있어야 한다는 의견에 동의한다. 다만, 센터 건립으로 그 많은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외국의 사례를 들고 있는데, 사실 그들이 보인 성과가 무용센터의 역할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선후를 살펴야 한다. 그들은 우리나라보다 춤 인프라가 두껍다. 그 두꺼운 인프라와 국민들이 예술을 대하는 인식이 우선이고 그 바탕에 국립센터가 생겨 인프라를 갈무리하는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무용계의 공감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국민적 공감 형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기자는 말이다.

글_ 이상헌(춤비평, 민주주의사회연구소 연구원)
사진_ 국립무용센터 건립 추진단 제공

국립무용단 [더 룸]

국립무용단과 김설진의 협업은 이미 많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안무가로서 뛰어난 저력을 보이는 김설진이지만 현대무용을 전공한 그가 한국무용수들과의 만남이라니 자칫 생소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역시 틈틈이 한국무용을 배워왔고, 그가 지닌 한국적인 몸짓에 대한 애정을 느끼면서 무용수들의 억눌려왔던 표현 방식이 얼마나 표출됐을지 궁금해져만 갔다. 한국무용수들은 기본적으로 발로 호흡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 무용수들이 아무리 흉내 내려 해도 그것은 표면적일 뿐 무용수들이 수년간 연마한 단전에서부터 나오는 호흡법을 따라할 수는 없다. 그것이 이번 작품에서 큰 에센스로 역할을 한 듯싶다. 공연을 볼 때 무용수들의 몸의 표정을 느껴보길 바란다.

글_ 윤혜준 기자
사진_ 국립무용단 제공

베를린비엔날레의 오후 3시, Sitting on a Man’s Head 2018을 기억하다.

스크린/ 스크린 댄스(2)

한국무용의 글로컬 상징, 김백봉 (金白峰, 1927-현재)

일본에서 혹독한 무용 수업을 거친 김백봉은 1943년 최승희 무용단의 대표적인 단원이 되어 조선과 일본을 넘어 중국과 만주, 동남아시아까지 순회하면서 세계적인 차원에서 무용 활동을 하였다. 이를 통해 그녀는 최승희 무용 계보를 정통적으로 이어받은 것이다. 여기에 김백봉은 1944년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동생이었던 안제승(安濟承, 1922-1998)과 결혼하였다. 최승희・안막은 해방 이후 월북하였고, 김백봉・안제승은 우여곡절 끝에 한국전쟁 이후 월남하였다. 이로써 한국무용에 있어서 해방 이전과 이후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존재는 최승희와 김백봉을 통해 비로소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글_이진아(문화사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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